나스 키노코의 감출 수 없는 "空"의 경계. (2)
COMMENT / 2010/02/12 17:50
3.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데, 상당부분 나스 키노코의 위치는 오히려 아라야 소렌에 닮아 있지 않은가? 아라야 소렌이 말하는 '기원'이라는 말에 속아넘어가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라야 소렌이 시키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안배한 꼭두각시들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이형의 존재가 아닐뿐더러, 그들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라야 소렌의 '기원회귀'에 의해서 각성한 것이라고 했을 떄, 그것 또한 하나의 환상적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 즉, 나스 키노코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근본적인 공백을 감추기 위하여 거대한 남근으로서 출현하는 것이 남성포식자로서의 료우기 시키라면 아라야 소렌에 의하여 각성한 캐릭터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의 외상적 경험(아사가미 후지노의 성폭행, 시라미즈 리오의 살인행위)에 대하여 오히려 '기원'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후행하여 출현한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뒤늦게 발견되지만, 오히려 앞서의 사건들로부터 소급된 의미를 달성하며, 거기에 그 자신의 본질이 있다고 믿게 한다. 즉, 아라야 소렌이 안배한 가장 기본적인 속임수는 '기원'이라는 것을 구성된 사건을 통하여 언제나 소급적으로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기원'은 오히려 최초에 거기 있는 근원적 위치에 있는 진실을 감춘다. 그들이 료우기 시키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료우기 시키에게는 부재하는 [ ]안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것 뿐이다.
이러한 증거는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고쿠토 미키야의 기원으로 언급된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문장은 어떤가? 이것은 동생인 아자카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인지만, 그것 또한 아자카의 기억 속에서 옆집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미키야가 보인 모습에 대하여 아자카가 소급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기원의 허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인물은 아사가미 후지노이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하는 체험 도중에 칼에 찔렸다는 착각에 의하여 '실제와 똑같은' 톡증을 느낀다. 그것이 만성 충수염 때문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질지라도 그것을 알기 이전까지 아사가미 후지노에게는 칼에 찔린 것은 하나의 실제적 현실이며 그것과 똑같은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즉, 아사가미 후지노의 몸에 남아있는 통증은 그 자신의 외상적 체험 속에서 발생했지만 해석되지 않는 것, 근본적인 결여로서만 남아있는 공백을 채워넣기 위한 순수한 상상적 구현물로서 존재한다. 그녀는 그러한 강박관념의 화신처럼 묘사되는데, 고쿠토 미키야에 대한 감정 또한 그것과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고쿠토 미키야가 그녀를 집에 데려와 보살펴주었을 때, 비로소 그녀의 과거의 경험과 감정은 새롭게 정당한 것으로의 의미, 그녀의 근본적인 감정으로서 인정받게 되지 않는가?
나스 키노코의 모든 소설에는 이러한 기원에의 강박적인 환상, 본질주의의 판타지가 가장 강력하게 모든 서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질에 대한 판타지는 오히려 그 자신의 이야기를 감당하기 못하기 자기모순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페이트>의 에미야 시로는 이 가장 실패한 버전으로서 "너는 ~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에 가장 충실할 수록 에미야 시로의 캐릭터성은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지고 그것을 소급적으로 확인하는 강박에 의지할지라도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story)는 설득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스 키노코가 만들어내는 서사는 점차 담화는 과잉되는 반면, 이야기는 빈곤해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료우기 시키야말로 그러한 나스 키노코의 근본적인 한계, 결여, 空의 지점을 그 자체로 감추면서 동시에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스 키노코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그녀는 이 서사가 스스로 붕괴하기 이전에 그것을 끝내기 위한 하나의 '억지력'(아마도 이 보다 정확한 표현은 '데우스엑스마키나'가 될 것이다.)으로서 등장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료우기 시키의 기원이 無, [ ]일지라도 그것은 나스 키노코에게는 그것의 공허는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등장하는 환상적 시나리오가 바로 료우기 시키의 다중인격이다. 료우기 시키의 세 개의 인격(양 여성적 인격 - 式, 음 남성적 인격 - 織, 양의 제3의인격 테두리 시키 - 경계식)이라는 허구는 제3의 인격의 출현으로서 그 자신의 공백을 채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아야 하는데, 과연 경계식으로서의 시키, 그 만능키처럼 보이는 제3의 인격이란 존재하는가? 그/그녀가 서술되었다고 해서, 코쿠토 미키야에 의하여 목격되었다고 해서 그 제3의 인격을 실제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그것이 코쿠토 미키야에 의해서만 목격되고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코쿠토 미키야의 환상적 시나리오일 혐의가 짙은 것인데, 오히려 <공의 경계>라는 이야기에서 구성적으로 작동하는 정언명령(나스 키노코)와 초자아(고쿠토 미키야)의 공모에 의해서만 그녀는 그럴듯한 존재로서 독자에게 생명을 얻지 않는가? 그러므로 경계식의 존재는 오히려 근원에 접근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근원을 감추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 그럴듯한 인격처럼 보이는 허구적 구성물은 나스 키노코의 거대한 공백을 감추는가? 오히려 드러내는가? 나스 키노코의 이후의 작품들과 그 변하지 않는 본질주의로 보아하건데, 답은 어느 정도 명확하다.
4.
이제 나스 키노코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이 글도 마무리 짓도록 하자.
라노베의 '새로운 감수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헛소리 시리즈>의 니시오 이신, <고스Goth>의 오츠 이치와 <문학소녀>의 노무라 미즈키, 그리고 이미 비쥬얼노벨에 있어서는 오히려 용기사07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와중에 결국 나스 키노코에 대한 21세기의 과도한 호명은 시대착오적으로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 또다른 증거의 단편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스 키노코의 '성애'에 대한 집착이라면 집착인데, 최근들어 비쥬얼노벨의 초점이 노출이나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묘사, 더욱이 '성애'의 묘사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입증된 바(더욱이 그것이 '팔아먹기' 위한 필수 덕목이 아니라는 것 또한), 나스 키노코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성애에 대한 묘사는 이미 그의 매니아들 또한 플롯에 종사하지 않는 별도의 서비스일 뿐이라고 느끼는 서술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는 성애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애와 에로티시즘은 소설, 그리고 문학의 본원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문제는 나스 키노코의 과잉된 담화와 빈곤한 스토리가 <공의 경계>에서는 료우기 시키라고 하는 한 인물에 의하여 채현되고 있었다면, <공의 경계> 이후에 반복되는 폭력-성애의 묘사로 전이되었지 않은가의 질문이다. 이를테면 그것이야 말로 그가 지닌 '空'에 대한 반복강박으로서 작동하는 담화상의 습관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러한 나스 키노코의 시대착오를 넘어선 <공의 경계>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개봉은 "왜 다시 <공의 경계>인가?"(왜 다시 나스 키노코인가?가 아니라)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이미 그 대답은 나스 키노코가 아니라 료우기 시키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나스 키노코를 이미 뛰어넘어서 료우기 시키처럼 숭배하기에 적합한 장르문학의 캐릭터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나스 키노코는 그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료우기 시키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료우기 시키의 비밀은 여전히 감춰진채로 독자에게 숭고한 존재로서의 위상에 남아있다. 그녀는 이제 나스 키노코의 <공의 경계>에 종사하지 않고도, 또 그의 서사의 '억지력'으로서 등장하지 않고 그 경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활동하고 있다.(<멜티블러드 : 엑트리스 어게인>에 상호텍스트적으로 홀로 등장한 그 모습은 어떤가?) 이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결론을 이끌어주는 것일까. 아마도 더이상 라노베의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공백을 감추기 위한 종속될 필요도 없으며, 어설픈 본질주의나, 서사의 플롯에 종사하는 행위자의 기능 정도로 축소되어 해석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타입문 매니아들이 "모든 건 버섯(きのこ) 맘에 달렸다."는 식의 우스개소리에도 집착할 필요는 없다. 어떤 권능을 지닌 작가에 의해서도 완전히 종결되는 인물이란 없을진데, 아직도 라노베 인물들에 드리워진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에게 적용될 법한 이러한 권능도 이제는 집어치울 때가 되었다. 바로 그 시대착오의 경계에 바로 나스 키노코와 그의 '空'의 경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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