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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직도 그렇게 모르나요? THE SCRIV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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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데, 상당부분 나스 키노코의 위치는 오히려 아라야 소렌에 닮아 있지 않은가? 아라야 소렌이 말하는 '기원'이라는 말에 속아넘어가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라야 소렌이 시키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안배한 꼭두각시들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이형의 존재가 아닐뿐더러, 그들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라야 소렌의 '기원회귀'에 의해서 각성한 것이라고 했을 떄, 그것 또한 하나의 환상적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 즉, 나스 키노코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근본적인 공백을 감추기 위하여 거대한 남근으로서 출현하는 것이 남성포식자로서의 료우기 시키라면 아라야 소렌에 의하여 각성한 캐릭터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의 외상적 경험(아사가미 후지노의 성폭행, 시라미즈 리오의 살인행위)에 대하여 오히려 '기원'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후행하여 출현한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뒤늦게 발견되지만, 오히려 앞서의 사건들로부터 소급된 의미를 달성하며, 거기에 그 자신의 본질이 있다고 믿게 한다. 즉, 아라야 소렌이 안배한 가장 기본적인 속임수는 '기원'이라는 것을 구성된 사건을 통하여 언제나 소급적으로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기원'은 오히려 최초에 거기 있는 근원적 위치에 있는 진실을 감춘다. 그들이 료우기 시키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료우기 시키에게는 부재하는 [  ]안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것 뿐이다. 

이러한 증거는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고쿠토 미키야의 기원으로 언급된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문장은 어떤가? 이것은 동생인 아자카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인지만, 그것 또한 아자카의 기억 속에서 옆집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미키야가 보인 모습에 대하여 아자카가 소급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기원의 허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인물은 아사가미 후지노이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하는 체험 도중에 칼에 찔렸다는 착각에 의하여 '실제와 똑같은' 톡증을 느낀다. 그것이 만성 충수염 때문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질지라도 그것을 알기 이전까지 아사가미 후지노에게는 칼에 찔린 것은 하나의 실제적 현실이며 그것과 똑같은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즉, 아사가미 후지노의 몸에 남아있는 통증은 그 자신의 외상적 체험 속에서 발생했지만 해석되지 않는 것, 근본적인 결여로서만 남아있는 공백을 채워넣기 위한 순수한 상상적 구현물로서 존재한다. 그녀는 그러한 강박관념의 화신처럼 묘사되는데, 고쿠토 미키야에 대한 감정 또한 그것과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고쿠토 미키야가 그녀를 집에 데려와 보살펴주었을 때, 비로소 그녀의 과거의 경험과 감정은 새롭게 정당한 것으로의 의미, 그녀의 근본적인 감정으로서 인정받게 되지 않는가?

나스 키노코의 모든 소설에는 이러한 기원에의 강박적인 환상, 본질주의의 판타지가 가장 강력하게 모든 서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본질에 대한 판타지는 오히려 그 자신의 이야기를 감당하기 못하기 자기모순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페이트>의 에미야 시로는 이 가장 실패한 버전으로서 "너는 ~해야만 한다"는 정언명령에 가장 충실할 수록 에미야 시로의 캐릭터성은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지고 그것을 소급적으로 확인하는 강박에 의지할지라도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story)는 설득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스 키노코가 만들어내는 서사는 점차 담화는 과잉되는 반면, 이야기는 빈곤해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료우기 시키야말로 그러한 나스 키노코의 근본적인 한계, 결여, 空의 지점을 그 자체로 감추면서 동시에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스 키노코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그녀는 이 서사가 스스로 붕괴하기 이전에 그것을 끝내기 위한 하나의 '억지력'(아마도 이 보다 정확한 표현은 '데우스엑스마키나'가 될 것이다.)으로서 등장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료우기 시키의 기원이 無, [  ]일지라도 그것은 나스 키노코에게는 그것의 공허는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등장하는 환상적 시나리오가 바로 료우기 시키의 다중인격이다. 료우기 시키의 세 개의 인격(양 여성적 인격 - 式, 음 남성적 인격 - 織, 양의 제3의인격 테두리 시키 - 경계식)이라는 허구는 제3의 인격의 출현으로서 그 자신의 공백을 채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아야 하는데, 과연 경계식으로서의 시키, 그 만능키처럼 보이는 제3의 인격이란 존재하는가? 그/그녀가 서술되었다고 해서, 코쿠토 미키야에 의하여 목격되었다고 해서 그 제3의 인격을 실제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그것이 코쿠토 미키야에 의해서만 목격되고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코쿠토 미키야의 환상적 시나리오일 혐의가 짙은 것인데, 오히려 <공의 경계>라는 이야기에서 구성적으로 작동하는 정언명령(나스 키노코)와 초자아(고쿠토 미키야)의 공모에 의해서만 그녀는 그럴듯한 존재로서 독자에게 생명을 얻지 않는가? 그러므로 경계식의 존재는 오히려 근원에 접근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근원을 감추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 그럴듯한 인격처럼 보이는 허구적 구성물은 나스 키노코의 거대한 공백을 감추는가? 오히려 드러내는가? 나스 키노코의 이후의 작품들과 그 변하지 않는 본질주의로 보아하건데, 답은 어느 정도 명확하다.


4. 

이제 나스 키노코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이 글도 마무리 짓도록 하자.

라노베의 '새로운 감수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헛소리 시리즈>의 니시오 이신, <고스Goth>의 오츠 이치와 <문학소녀>의 노무라 미즈키, 그리고 이미 비쥬얼노벨에 있어서는 오히려 용기사07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와중에 결국 나스 키노코에 대한 21세기의 과도한 호명은 시대착오적으로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 또다른 증거의 단편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스 키노코의 '성애'에 대한 집착이라면 집착인데, 최근들어 비쥬얼노벨의 초점이 노출이나 여성의 신체에 대한 묘사, 더욱이 '성애'의 묘사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입증된 바(더욱이 그것이 '팔아먹기' 위한 필수 덕목이 아니라는 것 또한), 나스 키노코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성애에 대한 묘사는 이미 그의 매니아들 또한 플롯에 종사하지 않는 별도의 서비스일 뿐이라고 느끼는 서술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는 성애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애와 에로티시즘은 소설, 그리고 문학의 본원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문제는 나스 키노코의 과잉된 담화와 빈곤한 스토리가 <공의 경계>에서는 료우기 시키라고 하는 한 인물에 의하여 채현되고 있었다면, <공의 경계> 이후에 반복되는 폭력-성애의 묘사로 전이되었지 않은가의 질문이다. 이를테면 그것이야 말로 그가 지닌 '空'에 대한 반복강박으로서 작동하는 담화상의 습관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러한 나스 키노코의 시대착오를 넘어선 <공의 경계>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개봉은 "왜 다시 <공의 경계>인가?"(왜 다시 나스 키노코인가?가 아니라)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이미 그 대답은 나스 키노코가 아니라 료우기 시키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나스 키노코를 이미 뛰어넘어서 료우기 시키처럼 숭배하기에 적합한 장르문학의 캐릭터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나스 키노코는 그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료우기 시키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료우기 시키의 비밀은 여전히 감춰진채로 독자에게 숭고한 존재로서의 위상에 남아있다. 그녀는 이제 나스 키노코의 <공의 경계>에 종사하지 않고도, 또 그의 서사의 '억지력'으로서 등장하지 않고 그 경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활동하고 있다.(<멜티블러드 : 엑트리스 어게인>에 상호텍스트적으로 홀로 등장한 그 모습은 어떤가?) 이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결론을 이끌어주는 것일까. 아마도 더이상 라노베의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공백을 감추기 위한  종속될 필요도 없으며, 어설픈 본질주의나, 서사의 플롯에 종사하는 행위자의 기능 정도로 축소되어 해석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타입문 매니아들이 "모든 건 버섯(きのこ) 맘에 달렸다."는 식의 우스개소리에도 집착할 필요는 없다. 어떤 권능을 지닌 작가에 의해서도 완전히 종결되는 인물이란 없을진데, 아직도 라노베 인물들에 드리워진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에게 적용될 법한 이러한 권능도 이제는 집어치울 때가 되었다. 바로 그 시대착오의 경계에 바로 나스 키노코와 그의 '空'의 경계가 있다.


Posted by THE SCRIVENER

1. 

벌써 꽤 시간이 흐른 이야기지만 국내에 음성적으로 많은 팬들을 양산했던 일본 동인게임회사인 "타입문"의 <월희(月姬)>는 나스 키노코라는 작가를 이미 국내에 지명도 있는 일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일조했다. 타입문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소설 작가로서 다작한다고는 할 수 없는 나스 키노코의 "소설"이 국내에 정식발매되어 소개된 것도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해온 국내팬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식발매의 대상이 일본내에서 문제적으로 나스 키노코를 주목하게 하며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공의 경계(空の境界)>가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기도 한데, 이미 일본 내에서상당히 시효가 지나버린 작품을 뒤늦게 호들갑스럽게 홍보하며 발매한 것도 시대착오적이었다면, 필자 또한 이제와서 이 작품을 논한다는 것도 이미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하여 굳이 논한다면 2000년대에  라이트노벨, 소위 라노베의 한국 상륙이 어느 정도 연착륙에 성공하면서 생기는 시차(時差), 혹은 그 위화감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데, 1900년대의 개화기 신소설의 발생에서부터 존재해왔던 이러한 한일 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영향과 그 격차-시차는 라이트노벨의 번역과 한국적 자기갱신화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공의 경계>와 나스 키노코는 이미 국내에 일정의 매니아층을 발생시켰으며 그들이 라이트노벨의 수요층과 상당부분 중복된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하면서 나름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 또한 <공의 경계>가 실제적으로 라이트노벨의 어떤 "경계"를 제공했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일에서 공히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의 경계>의 시대착오적인 유효성에 대하여 필자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굳이 그 위치에 나스 키노코와 <공의 경계>가 아닌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이 있다 할지라도 아마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내에서 라이트노벨은 이제 메인컬쳐와 서브컬쳐의 경계를 점점 모호하게 만들며 적극적으로 장르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주류문학을 공략하고 있으며, <공의 경계>를 대체할 작품들은 넘쳐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공의 경계>는 '뭔가 색다른 소설'로 읽히기에는 오히려 라이트노벨의 주류에 휩쓸려 지나치게 평이한 소설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게임을 포함한 나스 키노코의 작품들이 이미 그 한계를 뚜렷히 드러낸 것도 그 이유이다. 그의 문장은 필요 이상으로 묘사와 논평에 집착한 나머지 지나치게 산만해졌고,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던 장황한 서술도 점차 개성을 잃고 어느 샌가 과잉된 감정만이 분출되는 지나친 작가주의의 결말로 치달아 독자들을 쉽게 피곤하게 만들었다.(독자들은 생각한다 : 대체 이 버섯(きのこ)은 언제까지 중학교2학년의 사춘기인가!) 그러한 과잉된 담화(discourse)와 그 반대급부로 발생한 이야기(story)의 빈곤에 의해 많은 매니아들은 오히려 그것을 매우기 위해 <월희>의 방대한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라이트노벨을 즐기기 위한 "놀이터"로서의 작품의 '설정'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과도한 세계관 엿보기는 나스 키노코의 작품들의 채워질 수 없는 구멍(공백), 즉 '空의 경계'를 드러내보여주었을 뿐이다.(이것이야 말로 공의 경계가 더이상 이야기될 것이 없음에 불구하고 독자들에 의하여 과잉 소비되었으며, 이제는 아무리 회자된들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도 독자들로 하여금 가장 지속적으로 <공의 경계>를 읽게끔(소비하게끔) 하는 힘은 아무래도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 가능하다. 사실 답은 아주 단순한데, 소설보다는 만화에 가까우리만치 라이트노벨의 가장 확실한 소비대상은 그 이야기와 담론 자체보다는 개성있는 캐릭터인 것이다.


2. 

<공의 경계>는 '료우기 시키(兩儀式)'에 의하여 시작되고 료우기 시키에 의하여 끝난다. 단순히 주역이 없으면 스토리도 없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모든 인물의 행위와 사건들의 작인(作因)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사실상 그녀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스토리의 이해란 불가한 수준에 이른다. 더욱 극단적으로 말해 작품내에서 無를 자신의 기원으로 하는 그녀는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화되지 않는 현실의 찌꺼기, 즉 "실재"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실제로 그녀는 하나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위치"이며, 아라야 소렌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위치의 중핵이다.) 그녀의 존재감은 강렬하지만 소설 내부의 실제 세계에서 그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 허구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데, 역설적으로 그녀가 없을지라도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영향을 받는다. 마치 그녀의 존재는 히치콕 영화의 "맥거핀"과도 같은데,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그 효과만큼은 확실한 어떤 존재이다. 이것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독자는 설사 작품의 서술자가 이 소설의 히로인에 대하여 늘어놓는 장황한 설명의 반절 이상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어떤 존재"로서의 료우기 시키라는 인물의 강력한 매력에 의지하고 있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러한 그녀의 지나친 특수성은 사실 나스 키노코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비할 바가 아닌데, 이것은 단순한 캐릭터의 강함이나 美에 의해 위협받을 만한 것도 아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스 키노코의 "空의 경계"(그의 작품이 그 자신의 구멍, 결여를 감추기 위하여 얼마나 장황하게 다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 자체를 체현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녀를 제외하면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결여만을 낳는다. 실제적으로 그녀는 사실 작품내에서 너무나 독보적이어서 드라마 CD <아넨엘베의 하루>에서는 아예 <공의 경계>에서 단독으로 출현하지 않았던가. <월희>나 <페이트>가 다양한 캐릭터들이 상품화되는 데 비해 <공의 경계>에서는 거의 료우기 시키만이 그러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녀의 위상은 <공의 경계>에서 남다르다. <월희>의 알퀘이드나 <페이트>의 세이버의 존재 또한 현실의 외부로터 등장하는 기이함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에는 남성 주인공에 의하여 고양되고 그 결여를 채움으로써 비로소 상징화되는 영역에 있다면, 료우기 시키의 존재는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경계 이를테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숭고한 위상을 획득한다. 아라야 소렌의 음모, 그리고 시라미즈 리오의 살인행위는 그녀를 모방함으로써 그 숭고함에 닿으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데, 그들의 문제와 그 파멸은 오히려 그가 너무나 그 숭고한 존재, 그 비밀의 중핵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발생한다.(그렇다면 반대로 코쿠도 미키야는 그 비밀에 무심하기 때문에(혹은 무심함을 가장하기 때문에) 무사하지 않은가?) 태양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간 이카로스처럼 그들은 추락할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료우기 시키라는 인물이 딱히 색다른 캐릭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단순히 주동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여성이라는 말도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관점은 <공의 경계>를 상당히 오독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인데, <공의 경계>의 남성들에게 그녀는 흠모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지 않은가? 그 공포란 좀 더 정확하게는 거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즉, 그녀의 남성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는 참을 수 없는 남성포식자로서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는데, 좀 더 알기 쉽게 비교하자면 소설 <양들의 침묵>, <한니발>에 등장했던 한니발 렉터의 姓만이 바뀐 다른 버전에 다름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한니발 렉터처럼 료우기 시키는 그 자체로 타자에 의해 채워질 필요가 없는 완결된 존재인데, <양들의 침묵>의 스탈링의 존재처럼 <공의 경계> 또한 그녀를 온전히 혼자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코쿠토 미키야는 사실 료우기 시키와 별개의 다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료우기 시키의 초자아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문제는 그가 바로 그러한 초자아의 억압("너는 ~해서는 안돼.")으로서만 료우기 시키의 주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코쿠토 미키야의 존재는 료우기 시키를 현실 세계에 존립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즉 사회의 명시적 규칙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만 성립한다. 시키의 할아버지가 시키에게 남긴 유언을 기억해보라. "너는 평생에 있어 한 사람밖에 죽일 수 없다" 이것은 "너는 ~할 수 없다."의 다른 판본에 다름 아니다. 이 형식상 허락의 형태를 지닌 실제적인 금지야 말로 시키로 하여금 근본적인 억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그녀는 그 단 한 명을 찾기 위해서 밤의 거리를 배회하지만, 그녀의 결정은 계속해서 유예된다. 그녀가 진실로 그 한 명을 죽이는 순간 그녀는 더이상 현실세계에 존립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인데, 이러한 금기야 말로 그녀 자신을 속이는 속임수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료우기 시키의 근본적인 의식의 전도가 있다. "직사의 마안"을 지닌 그녀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죽여서는 안 돼는데, 오히려 이러한 금기야 말로 그녀로 하여금 살인에 대한 충동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즉, 애초에 상징계에 편입되지 않은 無에 기원을 둔 시키에게 "너는 죽일 수 없다."는 초자아의 억압이 떨어졌을 때 그것은 오히려 시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전복, 상징계의 파멸로 이끄는 의식의 전도를 발생시킨다. 그렇기에 그녀의 이미지는 남성을 거세하는 남성포식자로 그려질 수 밖에 없는데, 실제로 미키야 코쿠토를 죽이려 했을 때 료우기 시키의 행위는 성적으로 고양되어있지 않은가?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앞서 말한 나스 키노코의 감출 수 없는 空, 결여의 지점이다. 왜냐하면 료우기 시키는 사실상 나스 키노코의 내부에 있으면서 근본적으로 나스 키노코를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스 키노코의 결여에 의해 탄생했으면서, 그의 결여를 감추는 일종의 환상으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나스 키노코에 의해 탄생했으면서 나스 키노코를 넘어서는 존재, 그렇기에 그녀는 끊임없이 현실세계, 상징계에 올바르게 적응하고 편입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징계의 초자아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속삭인다. "너는 ~해서는 안돼!" 이러한 나스 키노코가 만들어낸 확대 재생산해내는 속삭임은 <Fate/stay night>에서의 주인공 에미야 시로에게서 이러한 초자아("너(여자아이)는 해서는 안돼.")의 역할로서 절정에 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으로 보았을 때 나스 키노코의 소설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된다. 어떻게 그에 의하여 발생한 그 이상의 존재,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금 지상의 세계로 끌어내릴 것인가.(어떻게 이 흡혈귀의 여성에게 여자다운 평범한 삶을 맛보여줄 것인가? 비범한 영웅의 전생을 살았던 여성을 어떻게 평범한 소녀로 되돌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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